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1세 (문단 편집) === [[공작(작위)|공작]]들의 반란 === [[알자스-로렌|로트링겐]]의 공작 길버트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서프랑크]] 국왕 [[루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루이 4세는 로트링겐이 서프랑크 왕국의 영역에 한 번 더 들어오길 원해 길버트와 힘을 합쳤다. 이에 오토 1세는 루이 4세의 최대 적수인 대 위그,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 기욤 1세, [[롤로]]의 아들], [[플랑드르]] 공작 아르눌프 1세와 동맹을 맺는다. 오토의 동생(!)인 바이에른의 하인리히는 메르젠부르크를 해방시키고 길버트와 합류하기 위해 행진했다. 오토는 그들을 쉐르브몽 성에서 포위했으나 루이 4세가 베르됭을 차지하자 그에 대항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오토는 루이 4세를 그의 수도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오토는 [[프랑켄]] 공작을 라인 강의 브리작 요새에서 포위했다. 이때 [[마인츠]]의 프리드리히 대주교가 오토에 대항하여 그의 군대를 이끌고 하인리히와 길버트의 편에 가담했다. 오토의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인 니더랑하우 [[백작]] 콘라트 쿠르츠볼트와 그의 사촌 웨트로와 라인가우의 백작인 오도는 반란군과 안더나흐에서 마주쳤다. 에버하르트는 전투에서 죽었으며 길버트는 [[라인 강]]에 빠져 익사하고 하인리히는 [[프랑스|서프랑크]]로 달아났다. 그리고 오토는 서프랑크 왕에 대항하는 대 위그의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로 했다. 941년 오토와 하인리히는 그들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화해했으며, 942년에 루이 4세가 로트링겐 밖의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자 서프랑크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나서 오토는 크베틀린부르크의 부활절 축하 행사 기간 동안에 하인리히를 암살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주교와 공모한 슬라브 부족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되어 하인리히가 도주했고 나중에 오토가 사면했다. 차후에 일어날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오토는 [[독일]]의 중요한 [[공작(작위)|공작]] 영지를 가까운 가족이 차지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비어버린 프랑켄 공작령을 자신의 영지로 유지했으며, 로트링겐 공령을 붉은 콘라트에게 주었다. [[바이에른]]의 베르톨트 공작이 947년에 죽자 하인리히에게 바이에른 공작령을 주었다. 그 동안 오토는 아들 루이트돌프가 슈바벤 헤르만 공작의 딸 아이다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하였고, 947년에 헤르만이 죽자 아들에게 영지를 상속받게 했다. 유사한 방법으로 하인리히 역시 949년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